그림의 말 (6)
김환기 화백의 ‘달 두개’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달 두개 | 1961.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하늘색 바탕에 파란 동그라미 두 개. 우리나라 추상미술의 선두 주자이자 우리나라 그림 최고가를 연일 갱신하고 있는 김환기 화백의 ‘달 두개’라는 작품이다.

파란색 달이라니. 달 속에는 산이 있고 강도 흐른다. 나란한 달은 웃는 사람 얼굴 같다. 전남 신안군 기좌도에서 태어난 그는 하얀 수건을 담그면 파란 물이 들 것 같은 바다와 눈이 부시게 푸른 하늘 아래 살았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파랑의 근원지가 바로 이곳이다. ‘환기블루’라고 일컬어지는 그만의 파랑.

왜 달이 두 개일까. 그의 인생을 들여다보니 단서가 보인다. 그가 운명적으로 사랑했던 그녀의 이름은 변동림.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하고 수필과 미술평론을 썼던 여성. 나이 21세에 천재 시인 이상과 결혼한 여인. “우리 같이 죽을까? 아니면 어디 먼 데로 갈까?”라는 말로 프러포즈를 했다는 이상.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에서 소지섭이 했던 명대사 “너 나랑 죽을래, 밥 먹을래?”의 원조다. 결혼 4개월 만에 일본으로 건너간 이상은 3개월 후 결핵이 악화돼 그녀가 건넨 멜론 한 입 먹지 못하고 “향취가 좋네”라는 마지막 말과 함께 눈을 감았다. 사랑하는 이상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7년이 지나 그녀는 무명의 서양화가 김환기를 만난다.

이 그림은 마치 두 사람이 투영된 것처럼 보인다. 나란히 한 방향을 바라보며 동등하게 빛나는 존재. 해와 달처럼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배회하지 않고, 달과 별처럼 서로 크기가 다른 빛을 발산하지 않는 똑같은 보름달 두 개. 그의 마음속 그녀의 무게이자 크기일 것이다.

김환기는 한눈에 그녀의 지성에 반했지만 당시 아이가 셋 딸린 이혼남이라 머뭇거렸다. 첫 번째 만남 이후 그는 섬으로 돌아와 날마다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렇게 둘은 오랜 기간 편지를 주고받으며 가까워진다. 하지만 재혼을 반대하는 그녀의 가족에 부딪힌다. 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버리고 그에게로 가 김향안으로 개명한다. 향안은 김환기의 아호였고, 김은 그의 성이다. 그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주었고, 그녀는 기꺼이 그의 이름을 받았다. 최근에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한국 버전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자신의 이름으로 불렀다니. 이름처럼 그녀는 또 다른 그가 됐다.

이 그림은 그가 파리에서 미술생활을 접고 서울로 돌아와 홍익대에서 교수 겸 학장을 지내던 시절에 그렸다. 외국에 나가보니 한국이 사무치게 그리웠고, 그들의 미술을 보고나서 깨달은 것이 “세계적이려면 가장 민족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예술이란 강렬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란 그의 명언이다. 남을 흉내 내는 그림이 돼서는 일류가 될 수 없음을 절감한 그는 가장 한국적인 것에 몰입한다. 조선백자의 열렬한 수집가이기도 했던 그는 그가 표현한 모든 곡선은 항아리에서 온 것이라고 했다.

“나는 항아리 값을 깎아서 사본 적이 없다. 장사꾼이 부르는 값이란 내가 좋아하는 그 항아리 값보다 훨씬 싸기만 했다. (중략) 사람들은 왜 이렇게 좋은 걸 사지 않나 싶어 민족에 대한 원한 같은 마음으로 마구 사들였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우리 항아리의 결점을 보지 못했다” 그의 항아리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잘 드러난 말이다.

이 그림을 그리기 10여 년 전, 무명의 그가 술에 취한 어느 날 “도대체 내 예술이 세계 수준으로 어디쯤에 위치해있는 건지 알 수가 있어야지”라고 한탄한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프랑스어 책을 사서 독학으로 공부하고 그를 위해 홀로 파리로 향한다. 둘 다 갈 수 없는 형편이었기에 먼저 가서 기반을 닦을 요량이었다. 파리에 도착한 그녀는 그곳 예술가들의 열정적인 작품 활동에 감명 받아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여기 좀 와 봐요. 여기 화가들이 얼마나 공부를 하고 있는가를”

한국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시국이 뒤숭숭할 때였다. 그는 어찌해볼 도리가 없는 막막한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피카소도 여기 갖다 놔 봐라. 별도리 없으리라”(1956. 향안에게 보낸 편지) 그녀는 다음해에 그가 그곳에서 전시를 할 수 있게 화랑을 예약하고 그가 그림을 그릴 공간을 마련하는 등, 그곳에서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렇게 그들의 파리생활이 시작됐다. 그녀는 그의 언어가 돼주었고 매니저이자 그의 손발이 됐다. “나는 생활에 있어서나 그림에 있어서나 아내의 비판을 정직하게 듣는다” 그녀는 그를 보필하면서 미술평론을 공부한다. 화가의 아내로서 당연한 선택이라며.

“사랑이란 지성이다. 지성으로 이해하고 지성으로 교류하며 지성으로 믿어야 오래갈 수 있습니다. 함께 성장해야 함부로 시들지 않습니다. 나의 성장이 그의 성장을 이끌고, 그의 성장이 또 나를 성장하게 하면서 서로에게 점점 잘 맞는 반쪽이 되어가는 일. 사랑이란 함께 성장하는 일입니다”(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중에서)

그녀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와 생활했는지 잘 보여준다. ‘함께 성장해야 함부로 시들지 않는다’ 남녀관계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를 아우르는 명문장이다. 누군가의 희생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양립의 관계. ‘달 두 개’가 보여주는 그 관계말이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 1970. | 환기미술관 소장

파리 생활을 접고 돌아와 국내에서 후학 양성에 힘쓰던 그는 안정된 생활을 버리고 돌연 미국으로 떠난다.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우리나라 대표로 참가해 회화부분 명예상을 수상(1963)하고 1년간 미국 록펠러재단의 후원을 받으면서다. 한국에선 대접받는 이름 있는 화가였지만 미국에서는 변방의 나라에서 온 이름 없는 화가일 뿐이었다. 후원도 1년이라 그 후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하는 곤궁한 생활을 했다.

뉴욕에서 외롭게 그림만 그리고 있던 1970년, 한국미술대상이 열리고 참가 의뢰를 받는다. 그의 친구 김광섭이 ‘저녁에’란 시를 보내왔다. 그 시의 마지막 구절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로 그림 제목을 정하고 넓은 캔버스에 점 하나하나를 찍어나간다. 스쳐지나간 인연, 다가올 인연, 잊힌 인연, 잊지 못하는 인연. 그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인연들에 대한 그리움을 화폭에 가득 채운다. 그리고 출품, 대상 수상. 그의 추상미술의 정점이 시작됐다.

“내가 그리는 선, 하늘 끝에 더 갔을까. 내가 그리는 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만큼이나 했을까.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 강산”(1970.1.27. 김환기)

김환기는 1974년 갑작스런 뇌출혈로 뉴욕에서 사망한다. 그의 나이 61세. 이후 김향안은 그의 그림들을 모아 세계 여러 나라의 전시에 참여, 그의 이름을 알리는 데 힘쓴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그를 위한 미술관을 짓는다. 부곡동에 위치한 환기미술관. 우리나라 최초로 사비를 털어 만든 미술관이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고즈넉한 공간이다. 지난주 이곳에서 그의 작품을 다시 보던 중 전시실 벽에 붙은 그의 글을 보았다.

“화재란 보는 사람이 붙이는 것. 아무생각 없이 그린다. 생각한다면 친구들, 그것도 죽어버린 친구들 또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친구들 생각뿐이다. 서러운 생각으로 그리지만 결과는 아름다운 명랑한 그림이 되길 바란다”(1972.9.14.) 그의 서러운 그림을 명랑한 기분으로 보려니 어쩐지 자꾸 울음이 났다.

그의 그림들을 관리하고 그를 알리는 데 30년을 보낸 어느 날, 그녀도 그의 옆에 나란히 누었다. 그를 보내고 쓴 그녀의 일기를 읽었다. 심장이 내려앉고 마음에 시린 바람이 일었다.

“아무것도 맛있는 것이 없다. 너는 정말 죽은 것일까. 55년에, 또 64년에 나는 혼자 혼자를 만나러 오던 길. 신나게 비행기를 탔었는데 인생이 모두 거짓말 같다. 사람 하나 사라졌을 뿐인데 우주가 텅 빈 것 같았다”

참고 서적 : ▲김환기 에세이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향안 에세이 ‘월하의 마음’ ▲정현주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개관 20주년 기념전 도록 ‘내가 사랑한 미술관’ ▲환기미술관 ‘내가 그리는 선 저 하늘에 닿았을까’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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