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18. 타슈켄트 ‘캉카’

중국의 서역 개척과 흉노

캉카(Kanka) 유적지와 왕궁 터.

이른 아침부터 태양포가 작렬한다. 섭씨 45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일찌감치 지상의 모든 물체를 무장해제 시켰다. 우즈베키스탄의 수도 타슈켄트에서 남서쪽으로 70㎞ 떨어진 곳. 한 무제의 명을 받아 출사(出使)한 장건이 목숨을 지켜가며 찾은 곳, 바로 캉카(Kanka)다.

캉카는 중국 문헌에 강거(康居)로 소개된 나라다. 중국의 서역 개척은 흉노 공략과 맞물린다. 흉노는 몽골 고원을 본거지로 삼아 중앙아시아, 만주, 시베리아를 오가며 수렵과 목축을 했다. 그들은 승마와 활쏘기에 능했다. 무용(武勇)을 자랑하는 전투적인 민족이었다. 중원을 통일한 진시황도 그들의 침략에 대비해 만리장성을 쌓았다. 하지만 장성이 흉노의 말발굽을 저지할 수는 없었다. 흉노의 중원 침략은 유방의 한나라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방 때부터 맺어진 흉노와의 맹약은 치욕이었다.

“한족의 황후여, 내가 사는 곳은 매우 쓸쓸하고 외로운 곳이오. 해서 내 한 번 그대 나라로 놀러가고 싶소. 듣자하니 그대도 과부라 하니 아주 외롭겠구려. 둘 다 불쌍한 처지인데 서로 가진 것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소이까?”

한나라는 치욕을 참으며 흉노를 달랬다. 매해 명주옷, 비단외투, 허리금속장식, 갖가지 옷감 과 곡물 등을 바쳤다. 황족의 딸들도 바쳤다. 이는 100여 년간 계속됐다. 7대 황제인 무제 때 가서야 흉노 정벌의 의지가 확고해졌다. 그리고 오랫동안 준비한 흉노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최고의 오아시스 도시, 캉카
 

캉카 왕 궁터의 해자.

저 성벽을 들어가면 휴식의 도시가 보인다네.
아름다운 여인과 향기로운 음식이 있고
격조 높은 숙소가 눈앞에 선하네.
졸졸졸 속삭이는 우아한 물소리
화려한 거리와 쾌활한 모습들
친절하고 기운 넘친 사람들이 있다네.

천 수백 년 전, 시인 페르다쉬가 노래한 캉카는 최고의 오아시스 도시였다. 그러나 물어물어 찾아간 캉카는 구릉마다 잡초만 무성하다. 여기저기 풀을 뜯고 있는 양떼와 말들뿐이다. 화려했던 캉카는 일장춘몽인 듯 스치는 바람뿐이다. 왕궁이 있었던 언덕만 덩그러니 속살을 내보이고 있다.

장건이 찾은 강거국은 2킬로미터의 성벽이 사방을 에워싸고 사방에는 화려하고 견고한 성루가 있었다. 성은 세 개의 구역으로 구분됐는데 왕궁은 최북단에 있었다. 높이 40미터 언덕 위에 세워진 왕궁 주위로는 아칸가란강의 물길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었다. 성안에 성을 만들었으니 그야말로 철옹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한 무제는 흉노와 적대국인 월지(月?)와 연맹해 흉노를 협공하고자 했다. 장건의 임무가 매우 막중했던 것이다. 장건이 가고자했던 월지국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 남부와 타지키스탄 서부지역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장건은 흉노에게 붙잡혀 포로가 됐다. 13년 만에 탈출에 성공한 장건은 우여곡절 끝에 대원국의 안내로 강거국을 방문하고 강거국의 협조로 월지국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뿐, 월지국의 왕은 “풍요롭게 살고 있으니 전쟁 따윈 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다. 장건은 목적 달성을 못하고 귀국했지만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들의 정보를 수집했고, 이 정보들은 이후 중국의 실크로드 개척에 중요한 바탕이 됐다.

캉카 유적지를 가로지른다. 예산 부족으로 발굴하지 못한 곳이 아직도 수두룩하다. 몇몇 발굴 장소는 아직도 지층 사이로 토기조각들이 그대로 있다. 반쯤 표출된 토기조각들을 캐어보며 당시의 현장으로 달려간다.

번화한 상가마다 흥정소리 요란하고, 향기로운 음식과 아름다운 음악이 거리를 가득 메웠으리라. 왕궁에선 이제 막 들어온 대상(隊商)이 이국의 진귀한 물품으로 왕을 알현하고, 왕은 맛있는 음식과 매혹적인 무희의 춤으로 여정의 노고를 격려했으리라. 골목마다 잘 익은 포도주가 잔에 넘치고 짧은 밤을 아쉬워하는 연인들은 온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으리라. 그리고 내가 지금 캐고 있는 토기는 그들의 애틋함을 위로하는 포도주를 가득 담은 술항아리였으리라.

내행화문(內行花紋)과 캉카의 영화(榮華)
 

캉카 유적 발굴 현장의 토기조각들.

바자르였을까. 아님 귀족의 저택이었을까. 붉은색 토기조각이 눈에 들어온다. 찬찬히 살펴보니 ‘내행화문(內行花紋)’이 새겨져 있다. 내행화문은 8개의 활모양 무늬를 두른 것으로 중국 후한(後漢) 때의 대표적 문양이다. 이로 미루어본다면 캉카는 이미 1~3세기에 중국과 교류할 정도로 기반을 갖춘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청동거울은 귀한 물건이었다. 뒷면에는 시대별로 독특한 문양을 그려 넣었는데 주변 민족에는 조공사절의 사여품(賜與品)으로, 대상들에겐 교역상품으로 매우 중시된 물건이었다. 이는 내행화문 자체가 중국 황제가 내린 사치품이자 부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멀리 떨어진 지역일수록 실물 전달이 어려워 조각을 내어 주기도 했는데, 이곳 캉카 유적지에서 발견된 토기의 밑굽에 그려진 내행화문(內行花紋)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이곳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작은 동물조각상과 생필품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문양이 가득하다. 캉카가 얼마나 부유한 나라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캉카는 사람들에게서 잊혀가고 있었다. 화려했던 영화(榮華)와 무용담(武勇談)도 새들의 전설이 돼버렸다. 한 마리의 양과 말에게서 얻는 젖과 고기가 삶을 이어주는 힘이기 때문이다. 근 2000년 전에 누렸던 문명의 흔적은 한 통의 젖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되고 말았으니, 그 무엇도 흥망성쇠의 바람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실크로드 교역의 증거물인 내행화문이 그려진 토기조각.
돈황 막고굴에 있는 장건서역출사도.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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