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문화] 역대 선거와 부정선거

지방선거 열기가 한창이다. 길 가는 곳 어디에서든 후보자들의 현수막과 선거운동원을 쉽게 만난다. 선거철에만 주민에게 고개를 숙이는 정치인의 모습에 신물이 난다는 이도 있고, 유세차량에서 흘러나오는 연설과 선거송에 귀가 따갑다는 이도 있다. 물론 내 목소리를 대변해 줄 제대로 된 정치인을 뽑는 기회로 생각하는 유권자도 있을 것이고, 누가 누구인지 알기가 어려워 아예 한 번호로 찍을 작정인 사람도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생각이 동시에 일어나기도 한다.

시끄럽고 정신없고 신물이 나더라도 분명한 건, 지금의 선거제도는 과거의 무수히 많은 부정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해왔다는 점이다. 선거는 대의민주주의의 근간이다. 과거 역사에서 저질러진 부정선거의 모습을 되짚어 봄으로써 선거의 의미를 되새겨보려 한다.

‘곤봉선거’ ‘경찰선거’의 등장

선거와 부정선거는 일제강점기부터 샴쌍둥이처럼 붙어 다녔다. 신문에 기록된 최초의 부정선거는 1923년 충남 천안 면협의원 선거에서 일어났다. 면협의원은 현재 구의원과 같은 자리다. 개표 과정에서 투표지에 일본인과 조선인의 선거인 이름이 각각 한 개씩 잘못 기재된 것이 나왔다. 그런데 일본인의 표는 유효표로 하고, 조선인의 표는 무효표로 처리하자 조선인들이 분개해 이를 도지사에게 항의하는 내용이 신문에 실렸다.(1923.5.27. 동아일보) 처리 결과는 기록된 것이 없다.

해방 후 1948년 실시한 1회 제헌 국회의원 선거는 미군정의 관리 아래 이뤄졌다. 1950년 제2회 국회의원선거부터 본격적인 선거관리를 시작했다. 선거를 앞두고 3월엔 우리 손으로 만든 국회의원선거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주요 내용은 선거인에게 투표를 목적으로 금전ㆍ물품 제공을 약속하거나 요구한 자, 후보자와 선거운동원을 폭행ㆍ협박ㆍ납치한 자, 집회 연설 방해 등 선거의 자유를 방해한 자를 처벌한다는 것이다. 선거는 몇 차례 연기 끝에 5월 30일 치렀다.

총39개에 달하는 정당ㆍ단체ㆍ무소속 후보들이 출마했다. 선거 결과 무소속이 정원의 60%인 126석이나 당선됐다. 이 선거에서 벌어진 부정선거에 대한 기록은 없다. 하지만 부정선거가 아예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전의 크고 작은 선거에서 꾸준히 벌어진 부정선거 사례와 4년 후인 1954년 5월 20일 치른 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드러난 행태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당시 민의원선거에 출마했던 조병옥이 <동아일보>에 글을 기고했다.

‘선거의 자유분위기를 보장한다고 한 행정당국의 누차의 공약은 말단 공무원 특히 말단 경찰관들의 불법적인 선거 간섭으로 말미암아 휴지화한 공약이 되고 말았다. (중략) 본인 자신이 출마하였던 대구을구의 실례를 여기서 상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관력과 폭력 및 모략중상이 횡행하였다는 것을 상기해볼 때 알 수 있는 일이거니와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전국 각 선거구에 경찰의 선거 간섭이 심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1954.6.8.)

아직 정당정치가 자리 잡지 않았던 시기였다. 이승만은 난립한 정당 사이에서 자유당의 집권을 위해 경찰을 동원해 선거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었다. 이 선거를 ‘곤봉선거’ ‘경찰선거’라 부른다.

올빼미·피아노·샌드위치표…닭죽표까지

1960년 3.15 부정선거 규탄대회.(출처·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195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언론에선 미리부터 부정선거를 조심하자는 기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승만은 3선에 도전한 상태였고, 진보당에선 조봉암이 후보로 나왔다. 자유당은 봉인된 투표함을 열어 표를 무더기로 바꿔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 유권자 수보다 투표수가 더 많은 곳이 나오기도 했다.

‘종로 개표구 내 자동투표함에서는 유권자 수보다도 투표수가 150매 더 많았고, 검표ㆍ개표에 있어 경찰관은 무시로 출입ㆍ관여하면서도 참관인의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못하는 채 일방적으로 시행되었으며, 신당동 투표구에서는 선거위원장의 실인까지 찍힌 정규 투표용지가 외부에 유출됐고, 본인이 투표하러 갔다가 이미 타인이 투표해 버린 예와 대리투표 시킨 사례 등 전반적으로 헌법 유린의 부정 사실들이 백일하에 횡행되었다’(1956.5.17. 동아일보)

주목할 점은 대구지역 대통령 선거 결과, 조봉암이 13만 표가 나와 5만 표에 그친 이승만을 크게 앞섰다는 점이다. 정치에 지역감정이 아직 섞여 들어가지 않은 상태였다. 1958년 4대 국회의원 선거에선 그야말로 부정선거 종합세트가 등장했다.

‘이번 선거에 도깨비표, 박쥐표, 올빼미표, 나이론표, 피아노표 등이 쏟아졌고, 투표와 개표를 감시하여야 할 참관인들은 맷집 노릇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었다는 것을 전 국민이 다 아는 사실이어늘, 국무위원 제현들만 은 사상 유례없는 명랑선거라고 하니 승부는 다 끝났다’(1958.5.18. 동아일보)

올빼미표는 개표 도중 불을 끈 뒤 표 계산을 바꾸는 것, 피아노표는 손가락에 인주를 미리 묻혀 놓았다가 개표 도중 반대표에 찍어 무효표를 만드는 것이다. 이밖에도 여당 표 다발 중간에 무효표를 끼워 넣는 샌드위치표, 반대 측 표에 도장을 한 번 더 찍는 쌍가락지표 등, 다양한 방식이 활용됐다. 가장 기상천외한 방식도 나왔다. 이른바 ‘닭죽표’라 불리는 이 사건과 관련해 당시 선거에 나섰던 이정래씨의 회고가 2002년 <신동아> 9월 호에 실렸다.

‘1958년 5월 20일 저녁 개표하는 시간에 집에서 자고 있는데 참모가 깨우며 큰일 났다는 거야. 그래 개표장으로 뛰어가 보니 희한한 광경이 벌어지지 않았겠어. 개표 참관인은 모두 코를 골며 자고 있고, 뒷마당에서는 투표용지가 불타고 있었어. 진상을 알아보니 야식으로 끓인 닭죽에 여당 측이 수면제를 넣어 참관인들에게 먹인 거야. 그리고 한쪽에선 자유당 측에서 동원한 깡패들이 항의하는 여당 참관인들을 밖으로 집어던지고 있었어’

이 선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도 큰 수모를 겪었다. 그는 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하려했다. 후보 등록을 위해 주민 100명 이상 추천을 받아 선거관리위원회에 제출했으나 다음 날 등록이 무효 처리됐다는 연락이 왔다. 김대중과 자유당 후보를 중복 추천한 사람이 70명이나 된다는 거였다. 군청 공무원과 경찰이 김대중을 추천한 주민들을 찾아가 자유당 후보도 추천하게 한 공작이었다.

등록 마감 하루 전날, 그는 다시 새로운 주민을 찾아다녔지만 이번엔 추천서에 찍을 도장이 없었다. 이장들이 비료 배급에 필요하다며 인감도장을 걷어간 것이다. 새로 도장을 새겨야했지만 동네의 모든 도장방에서 이를 거절했다. 역시 경찰의 사전 작업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호박꼭지에 주민들의 이름을 새긴 ‘호박 도장’을 만들었다. 하지만 호박 도장이라는 이유로 다시 등록이 취소되고 말았다.

4.19혁명 기폭제가 된 부정선거
 
부정선거 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60년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진 3.15부정선거다. 대통령 단독후보였던 이승만은 부통령에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공무원을 통해 선거운동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들이 이를 감시하게 했다. 정치깡패를 동원해 자유당을 찍어야한다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투표 전날 자유당에 기표한 가짜 투표용지를 무더기로 미리 투표함에 집어넣었다. 투표 당일, 자유당 측은 투표용지를 20장씩 가져가 투표하고, 기표소까지 들어가 누구에게 표를 던지는지 확인했다. 야당 참관인은 투표소에서 내쫓아버렸다. 결국 이기붕 득표율은 100%에 가까웠고, 이를 70~75%선으로 조정하라는 지시에 전국에서 다시 감표 작업을 하기도 했다.

당일 오후 4시 반 무렵, 민주당은 언론에 이 사실을 알리는 담화를 발표했다. 이튿날 마산을 시작으로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시위가 전국에서 일어났다. 4월, 마산 앞바다에서 학생 김주열이 최루탄이 눈에 박힌 주검으로 발견되자 시민들의 분노가 커졌고, 이는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는 모든 선거를 통틀어 3.15부정선거와 함께 가장 나쁜 선거, 타락한 선거로 손꼽힌다. 박정희 집권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가 선거 유세장에 나타나 지원유세를 하는 일이 벌어졌다. 유권자들은 후보들에게 돈이나 물품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투표 당일에도 공개투표, 대리투표, 표 바꿔치기 논란이 또 다시 일었다. 전국 각지 학생들이 부정선거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였다. 시위를 무마하기 위해 중앙정보부는 독일과 프랑스의 유학생과 교민 등이 간첩교육을 받고 활동하고 있다는 ‘동백림 거점 간첩단 사건’을 꾸몄다. 작곡가 윤이상, 화가 이응로, 시인 천상병이 연루돼 고초를 겪었다.

박정희가 당선된 1971년 7대 대통령 선거도 마찬가지다. 당시 박정희가 선거비용으로 사용한 돈은 700억원에 달하는데 이는 당시 국가 예산의 10%에 해당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상대 후보로 나온 김대중을 겨냥해 ‘김대중 후보가 정권을 잡으면 경상남도 전체에 피의 보복이 있을 것’이라며 공포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감정이 등장하기 시작한 건 이 때부터였다. 투표 결과, 박정희와 정치 신인 김대중의 표차는 고작 8%에 불과했다. 김대중은 이후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될 때까지 오랜 기간 정치권에 등장하지 못했다.

내 권리를 지키는 법

국정원 댓글 조작 사건 JTBC 보도 화면 갈무리 사진.

1987년 13대 대통령 선거 당일 오전, 구로구청 현관 앞에서 투표함이 반출되고 있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그 투표함은 귤과 빵, 과자가 실린 트럭의 상자 안에 봉인되지 않은 채 발견됐다. 선거법상 투표함은 투표가 끝나기 전엔 옮길 수 없다. 시민들은 이 투표함을 지키겠다고 나섰고, 이날 저녁 시민 6000여명이 구청에 모였다. 하지만 자정 무렵 백골단이 구청에 난입해 진압하는 과정에서 시민 17명이 크게 다쳤다. 이 투표함은 내내 밀봉돼있다가 2016년에 개표됐다. 조작되거나 위조되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의문점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1992년엔 군 부재자 투표에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내부고발이 터졌다. 군대에서 여당 후보 지지와 공개투표를 강요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양심선언으로 영외투표법이 개정되는 성과를 얻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국정원과 국방부가 선거기간 중에도 인터넷 댓글과 가짜뉴스 등으로 여론조작에 나섰다. 이것을 부정선거라 보는 시각도 많다.

부정선거를 옛 일이라 여기며 팔짱끼고 있기엔 아직 이르다. 대의민주주의가 지속되는 한, 그리고 정치인이 많은 특권을 누리는 현 상태가 유지되는 한, 부정선거가 일어날 위험은 늘 도사리고 있다. 투표하는 것은 내 권리이지만, 내가 던진 표가 제대로 결과에 반영되는지 감시하는 것 역시 내 몫이다. 선거 때 투표 참관인이나 개표 참관인으로 적극 나서고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가짜뉴스가 퍼지거나 불법선거운동이 벌어지고 있지는 않은 지 살피면 좋을 것이다. 내 권리가 제대로 지켜지는지 두눈 부릅뜨고 지켜봐야한다. 이것이 민주주의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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