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다 끝났어. 이제 걱정 없어!”

조카한테서 문자메시지가 왔다. 올해 초등학교 5학년인 남자아이다. 우린 한때 꽤 친했다. 굳이 ‘친했다’고 과거형을 쓴 이유는 조카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친한 친구들이 생기고 바빠져 나와 소식을 주고받는 일도, 만나는 일도 뜸해졌기 때문이다. 조카가 먼저 연락하는 건 정말 드문 일이다.

그런 조카가 얼마 전 우리 집에 놀러 와도 되느냐고 연락해왔다. 목적이 있었다. 우리 집 고양이 ‘미미’를 보는 것이다. 미미가 길고양이였던 시절, 조카와 함께 밥을 챙겨준 적이 있어서인지 조카는 미미에 대한 애정이 깊다. 두세 달에 한 번, 이모가 아닌 미미를 보러 우리 집에 오는 조카를 나는 황송한 마음으로 맞이한다.

그날도 함께 밥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었다. 평소 같으면 굳이 묻지 않아도 그간 있었던 일들을 쫑알거릴 텐데 이날따라 부쩍 말수가 적다. 심지어 미미를 옆에 두고도 본 척 만 척, 핸드폰 게임 삼매경이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무렵, 조카가 방바닥에 벌러덩 드러눕더니 큰 숨을 내쉬었다. 혹 걱정거리가 있는지 조심스레 물었다.

“실은, 다음 주에 치과에 가야하거든. 충치 때웠던 게 빠졌어” 아, 그 충치라 하면…!

3년 전, 초등학교 2학년이었던 조카의 입에서 충치 여러 개가 나왔다. 난생 처음 치료다운 치료를 받은 조카는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놀라 많이 울었다. 의사는 충치 말고도 흔들리는 유치 두 개를 발견했다. 온 김에 뽑고 가라는 의사의 말에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고 이내 발치를 시작했다. 이 한 개를 뽑았을 때 조카는 울지 않았다. 두 번째 이를 뽑는 순간, 조카는 엄청난 통증을 느꼈다. 소리를 지를 새도 없었다. 이가 뽑힌 자리에선 빨간 핏물이 배어나왔다. 생니를 뽑힌 조카는 몇 시간 동안 서럽게 울었다.

ⓒ심혜진.

이날 이후 치과는 조카에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곳이 됐다. 다음 번 치과에 갈 날이 다가올수록 조카는 기운을 잃어갔다. 밤만 되면 언니를 붙들고, 혹시 치과에서 죽은 사람이 있는지, 묻고 또 물었다. 아무리 간단한 치료라고 안심을 시켜도 조카는 마음을 놓지 않았다. 드디어 치과에 가기로 한 당일 아침, 조카는 불안감에 곧 쓰러질 듯 한 얼굴로 평소와 다른 행동을 했다.

우선 나뭇가지 끝에 고무패킹이 달린 화살을 자신의 나이만큼 아홉 번 벽에 쏘았다. 가장 아끼는 무기 플라스틱 칼도 역시 아홉 번 휘둘렀다. “안녕, 내 화살. 안녕, 내 무기들” 조카는 거의 울듯이 자신의 무기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진지하고도 엄숙했다. 그리고 식탁에 앉았다. 전날 저녁, 먹고 싶은 반찬을 미리 말해둔 터였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 모를 식사의 메인 반찬으로 조카는 채소부침개를 선택했다.

부침개는 조카가 유일하게 거부감 없이 먹는 채소반찬이었다. 채소를 많이 먹이고 싶었던 언니는 부침개에 부추와 당근, 애호박이나 쪽파를 잘게 썰어 넣었다. 다행히 조카는 돈가스보다 채소부침개를 더 좋아했다. 조카는 이날 부침개를 깊이 음미하며 천천히 먹었다. 책가방을 매고 현관문을 나설 땐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안녕, 내 집”

자신의 목숨과 맞바꿀 뻔했던(!) 그 충치가 3년 만에 다시 말썽을 부린 것이다. 조카가 우리 집에 놀러오겠다고 한 것도 어쩌면 그 불안감을 회피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잔뜩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간 조카는 며칠 뒤 “이제 걱정 없다”는 짧은 메시지로 홀가분한 기분을 내게 전했다.

입 안에 마지막으로 음식을 넣는 그 순간은 누구에게든 찾아온다. 반드시. 조카가 미리 체험한 것처럼, 언젠가 나도 그 순간을 엄숙하고 진지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어떤 음식을 내 생의 마지막 음식으로 선택할까. 물론 그 순간을 미리 알 수 있을 때 가능한 일이지만 말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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