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말 (5) 발레리나

페르난도 보테로. 2001.안티오키아 박물관

“어머, 어떡해”란 말과 동시에 웃음이 터진다. 뚱뚱한 여자를 향한 비웃음이 아니다. 페르난도 보테로의 ‘발레리나’. 그의 그림은 건강하고 위트가 있으며 유쾌하다. 현재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콜롬비아의 국민화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 열 명 중 한 명. 몇 해 전 한가람미술관에서 그의 전시를 본 후, 아트숍에서 이 그림 액자를 샀다. 액자는 가벼우나 왠지 육중함 때문에 떨어질 것 같아 거실 벽 아래쪽에 걸었다. 화가 날려다가도 우울하려다가도 이 그림만 보면 웃음이 나고, 그 웃음은 행복을 데려온다.

신발, 머리 꽃핀, 귀걸이까지 깔맞춤이 완벽하다. 몸의 양감을 극대화해 이목구비와 발은 상대적으로 작게 그렸다. 과장된 비례, 안정적 구도, 균형미, 무엇보다 표정이 압권이다. 힘들지 않은 척하는 새침한 표정이 귀엽고 앙증맞아 보여 와락 껴안고 싶다. 거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 때면 그림 속 모델에게 속삭인다. “다리 내리고 편히 있어요. 난 이제 불 끄고 들어가요”

그는 뚱뚱한 사람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게 중요한 건 ‘양감과 색채’이며 풍부한 양감 표현을 위해 볼륨이 있을 뿐이란다. 또, 색채를 풍부히 사용하려면 그 만큼 넉넉한 지면이 필요하다. 색을 적게 보여줄수록 작품이 더 다채로워진다는 그는 한 작품에 적은 수의 색으로 그것들을 혼합해 표현한다. 그에게 있어 볼륨은 행복의 상징이며 건강과 긍정을 의미한다. 이것은 남미의 특성(풍만함 = 건강, 부유, 즐거움)과 연결돼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니다. 1932년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태어난 그는 네 살 때 외판원이었던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게 자랐다. 미술교육은 먼 나라 이야기. 타고난 재능과 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열여섯 살엔 지역신문에 삽화를 그렸다. 채색 스케치를 팔아 고등학교를 마친 그는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로 이주했다. 그곳에서 개인전 두 번을 성공적으로 치룬 후 콜롬비아 미술전람회에 출품해 2위에 뽑혔다. 그의 나이 스무 살. 받은 상금으로 스페인 행 3등석을 탔다. 긴 현장학습의 시작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미술관은 그의 학교가 됐다. 벨라스케스, 고야, 티치아노, 틴토레토와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그들의 그림이 다른 수많은 그림들과 달리 어떻게 명작이 됐는지를 연구한다. 모사한 그림을 관광객에게 팔며 그림 공부를 하고, 생계를 유지했다. 다시 파리로 이동한다. 당시 파리를 휩쓸던 현대미술에는 관심이 없었던 그는 대신 루브르로 가서 대가들의 그림을 연구했다. 다음 해에는 르네상스의 발원지 피렌체로 이동해 우첼로, 마사초 등의 그림과 15세기 미술사, 프레스코 기법을 집중적으로 공부한다. 르네상스 그림은 인체 표현이 육중하고 양감이 풍부하다.

그의 지금 그림은 프라도미술관에서 공부한 스페인거장들의 그림에, 루브르에서 대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배운 비례와 구도에,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풍부한 양감과 콜롬비아 특유의 낙천성 등의 집합체라 하겠다.

“아무도 나만큼 타인의 영향을 많이 받아들인 사람은 없다. 하지만 내 첫 전시는 독학으로 그린 그림으로 전시에 참가한 것이다. 그 뒤에 나는 전 세계적으로 관심이 가는 화가들의 그림을 찾아다녔으며 흥미가 끝나갈 무렵 나만의 그림을 그렸다”(페르난도 보테르).

창작은 탄탄한 배경지식이 있어야 가능한 법.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과장된 인체 비례로 제도화된 규범을 조롱했으며, 미의 기준을 풍자하고 뚱뚱한 인물 묘사로 자신의 메시지를 강조했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