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김락기 인천문화재단 인천역사문화센터장

6.13 지방선거가 다가온다. 많은 이들의 출사표와 포부가 언론으로 전해지는 이때에 특별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해연 김재곤 선생이다. 인천에서 해연 선생을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을 것이다. 1912년 생으로 1960년대 초까지 인천에서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고 1994년 6월에 작고했으니 먼 과거의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000년대 중반 <경인일보>에서 인천의 각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을 조사, 취재해 엮은 ‘인천 인물 100인’(2009.2.)과 작고하기 몇 달 전인 1994년 1월 27일 용현동 자택에서 <황해문화>의 ‘원로를 찾아서’란 기획으로 인터뷰한 내용이 같은 잡지 2호(1994.3.)에 실려 있어 그나마 선생의 삶과 생각을 살펴볼 수 있는 정도다.

인천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낀 마산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진해고등해원양성소를 졸업한 바다사람이었다. 목포항만청장과 부산항만청 부청장을 거쳐 인천해사국장에 부임하며 인천과 맺은 인연은 자유당 소속으로 3대 국회 민의원으로 연결됐고, 이내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자유당을 탈당해 민주당 소속으로 나서 4대와 5대 국회 민의원을 지냈다.

그런 한편에 이미 1950년대에 야구협회와 축구협회 회장을 맡는 등, 인천 체육계의 지도자이자 든든한 후원자로도 활동해 인천 현대사의 큰 줄기를 짊어지고 간 분이기도 하다.

인천에 대한 사랑과 책임감은 남다른 면이 있다. 조금 길지만 <황해문화>에 실린 선생의 말씀을 들어본다. “…마산 시골놈이 대도시 인천에 와 가지고, 더군다나 천리타향에 와서 인정 설고 말조차 설은 타향에서 말이지, 내가 삼선 의원을 할 때 내 스스로가 개인으로서 고통과 서러움에 받쳐서 울기도 많이 했고, 발버둥도 많이 쳤지마는 나를 도와준 인천 유지들을 생각할 때 내가 그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어떻게 보답할 것이냐? 보답할 길이 있다고 하면 내가 인천을 영원히 떠나지 않는 게 보답하는 길이다. 내 자식들은 소련에 가 살든지 미국에 가 살든지 일본에 가 살든지 내가 그거 알 바 아니다. 그러나 인간 김재곤이, 개인 김재곤이는 거기에 보답하는 뜻에서라도 인천을 떠날 수가 없어.…” 이미 50여년 전에 이런 마음을 품고 산 사람이 있었다.

성공하면 떠난다는 말이 마치 인천이란 도시와 인천 사람들의 생각인 것처럼 심심치 않게 언급되는 현실에서 해연 선생의 말씀은 새삼스럽기까지 하다. “나는 내 평생을 인천에서 살다가 인천에서 죽어야 된다”는 말씀대로 마산의 선영을 마다하고 검단 산자락에 산소를 모셨다고 한다.

인천 사람들에 대한 따끔한 지적도 잊지 않았다. “인천고등학교나 동산고등학교가 지방에 가서 우승을 하고 올라오지 않습니까. 시내 행진을 하거든요. 그래 막 좋아하지요. 그런데 어쩌다가 못 이긴다 말이야. 쳐다도 안 보고 욕을 막 해버려요. 조금도 도와주지 않고. 이거 기가 찰일 아닙니까?” 지금은 과연 어떤지 되새겨볼 만한 이야기다.

모든 이가 해연 선생처럼 살수는 없다. 오는 데 이유가 있듯이 가는 데도 이유가 있다. 막는다고 막아지는 것도 아니다. 인천에 살면서 내 인천이 불만인 이들은 어쩌면 본인이 좋다고 생각하는 도시로 떠나는 게 행복한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민 앞에서, 시민을 위해 일하겠다는 각오와 약속으로 나선 분들이라면 한번쯤 해연 선생의 의지를 생각해 봄직하다. 그러면 행보는 신중해질 것이고, 신중해진 행보만큼 약속도 무거워질 것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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