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우범 시민기자의 사라진 도시를 찾아서 17. 페르가나, ‘천마’의 고향 대완국

한나라 무제의 ‘서극천마가’

아크쉬켄트를 침식하는 시르다리야.

기원전 126년. 중국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武帝)는 장건을 특사로 임명에 대월지국에 보냈다. 무제의 숙원인 흉노 정벌을 위해서다. 장건은 대월지국과 연합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3년 만에 귀국한다. 하지만 그는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무제가 최고의 관심을 가진 것은 대완(大宛)국의 한혈마(汗血馬)였다.

무제는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한혈마만 있으면 흉노를 제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은 고대의 최신 병기였다. 특히, 하루 천리를 달리는 한혈마는 전투에서 승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핵심 무기였다. 한 무제는 곧바로 대완의 이사성(貳師城)에 있는 한혈마를 천금을 주고라도 사오게 했다. 하지만 대완이 순순히 한혈마를 내어 줄 리 없다. 사신마저 죽였다.

분노한 무제가 이광리를 보내 대완국을 격파하고 말 3000여 마리를 가져왔다. 이광리는 이 전투에서 많은 병사와 물자를 잃었다. 이를 대신해 가져온 말이었다. 하지만 무제는 하늘을 날 듯 기뻤다. 병사 수만 명보다 마리 3000여 마리가 더 소중했다. 그는 즉시 ‘서극천마가(西極天馬歌)’를 지었다.

천마가 오네 서극에서 오네
만 리를 넘어 중국으로 돌아오네
신령한 위엄을 이어받아 외국을 항복시키니
유사(流沙)를 건너 모든 오랑캐가 복종하네

대완국의 도성 아크쉬켄트

페르가나서 만난 몇 마리의 말들.

고대 대완국이 있었던 곳, 우즈베키스탄의 남쪽 도시인 페르가나로 향한다. 페르가나는 북쪽으로 천산산맥과 남쪽으로 파미르고원으로 둘러싸인 50㎢의 거대한 분지다. 말들이 초원에서 풀을 뜯고 있는 것이 보인다. 하지만 언뜻 보기에도 한혈마가 아니다. 말도 몇 마리 되지 않는다. 명마의 고향에 명마가 없다. 그 자리를 대신한 것은 양이다. 이제 명마의 고향은 전설이 됐다.

대완국의 도성(都城)은 어디에 있었을까. 한혈마는 사라졌어도 도성 터는 남아있을 터. 전문가와 함께 도성을 찾았다. 도성이 있던 곳은 아크쉬켄트다. 아크쉬켄트는 페르가나 북쪽으로 흐르는 시르다리야 강기슭에 있다. 도성 터에 도착하니 사방의 드넓은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온다. 가히 도성 터로 손색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유적지가 그러하듯 아크쉬켄트도 폐허인 채 버려져 있다.

고대 최고의 무기 ‘천마’

폐허로 변한 대완국의 도성 아크쉬켄트.

한 무제의 공략으로 대완국은 기원전 102년에 멸망한다. 그러나 최신 병기인 천마는 중국과 주변국들의 보호 아래 품종이 더욱 개량됐다. 한나라와 다투며 성장한 부여는 한나라가 멸망한 4세기 초에 천마를 확보한다. 기병이 강했던 고구려 역시 천마를 구하기 위해 애썼다. 무용총 벽화가 보여주듯 늦어도 5세기에는 천마를 보유한다. 고구려는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시기인 5세기에 최대의 영토를 개척한다. 이때 최고의 공훈을 세운 것은 바로 천마로 이뤄진 개마기병(鎧馬騎兵)이다. 개마기병은 사람과 말이 철갑으로 무장한 기마병이다.

신라는 6세기에 천마를 확보한다. 경주 천마총의 천마도가 이를 잘 보여준다. 고대의 천마는 시대와 국가를 넘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확보해야 할 최고의 무기였던 것이다.

아크쉬켄트를 침식하는 시르다리야 강

유적지에 널린 각종 도자기와 토기 조각들.

도성 터를 걷는다. 눈으로도 시대를 구분할 수 있는 도자기와 토기 조각이 지천이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이어온 도성이었기에, 얼마나 많은 민족이 살아간 흔적이었기에, 이토록 시간이 지났음에도 발길에 차이는가. 실로 대완국 시대의 번창함이 허공에 그려진다. 하지만 그뿐. 나그네의 상상력도 강물이 깎아놓은 절벽 앞에서 무너진다. 시르다리야 강이 끊임없이 성벽을 침식하며 갈아먹고 있는 것이다. 그러함에도 성벽은 500여 미터가 남아있다. 그 옛날 번창했을 도성의 크기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

이 도성이 이렇게 폐허가 된 것은 몽골의 침입 때다. 칭기즈칸이 교역을 위해 보낸 사신과 상인들이 오트라르 총독에게 살해됐다. 칭기즈칸은 이를 빌미로 중앙아시아 전 지역을 처참하게 짓밟았다. 이 도성도 그때 몽골군의 공격을 피해갈 수 없었다. 몽골군은 항복하지 않으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도륙했다. 하지만 오직 하나만은 예외였다. 바로 천마인 한혈마다. 한혈마는 몽골의 말보다도 더 뛰어났던 것이다.

이제 한혈마가 무슨 소용 있겠는가

대완국 도성 발굴 현장.

어디쯤 황궁이 있었을까. 방위와 성문터를 살펴보며 위치를 가늠해본다. 하지만 시르다리야가 저토록 쉬지 않고 갈아먹고 있으니 좀체 알 수가 없다. 고대 유적지가 강물에 휩쓸려가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한다니. 대완국의 흔적도 조만간 사라진다는 생각에 나그네의 가슴이 아려온다.

페르가나 국립대 고고학과 게다니 이바노프 교수의 가슴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도성 발굴 책임자다. 하지만 동동가슴뿐이다. 문화재의 중요성에 대한 국민적 이해도가 낮아 추가 발굴은 꿈도 꿀 수 없기 때문이다.

성터를 한 바퀴 돌아 나온다. 순간, 천마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뒤돌아보니 열풍이 회오리바람만 일으킨다. 그렇다. 천마의 고향 페르가나는 더 이상 명마의 고향이 아니다. 그 옛날 페르가나 계곡을 누볐을 한혈마는 찾아볼 수 없다. 설령 있다한들 자동차와 비행기의 시대에 한혈마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첨단은 시대와 함께 사라지고 시대와 함께 탄생한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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