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렛 더 선샤인 인

클레어 드니 감독|2018년 개봉

한 여자가 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실력 있는 아티스트인 그녀는 몇 해 전 이혼했다. 그녀는 사랑에 굶주려 있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그녀에게 반해 수작을 거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지만 특별한 사람과의 남다른 관계, 진실한 사랑을 추구하는 그녀에게 사랑은 언제나 목마르다.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고 섹스를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상처뿐. 매일 밤 사무치는 외로움과 자신에게 더 이상 사랑은 없다는 절망에 흐느낀다. 그러나 포기를 모르는 그녀. 밤새 울고 난 뒤에도 이 사람은 사랑이지 않을까, 기대를 품고 또 다른 남자를 만난다. 그러나 ‘혹시’의 결과는 역시! 도대체 사랑이 뭐길래?

클레어 드니 감독의 ‘렛 더 선샤인 인’은 진실한 사랑을 갈구하는 50대 여성의 연애실패담이다. 로맨스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이면서도 전혀 로맨틱하지가 않다. 오히려 사랑을 찾는 과정의 피로감과 계속 이어지는 연애의 지리멸렬함이 보는 이로 하여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든다.

주인공 이자벨(줄리엣 비노쉬)이 만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별로다. 그녀에게서 육체적 쾌락만 취하려는 욕심 가득한 유부남부터 그녀와의 연애를 즐기고 싶지만 발목 잡히고 싶지는 않아 애매모호한 태도로 일관하는 남자사람친구, 딸과 집을 빌미로 제 마음 내킬 때 불쑥 찾아오는 전 남편, 그녀와 전혀 다른 처지라는 이유로 그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이기적인 남자…. 거기에 만날 때마다 자기 별장에 놀러 오라고 껄떡대는 이웃, 그녀의 연애에 조언하는 척 치근덕대는 동료까지, 이자벨의 남자들을 보고 있자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남자들만 이상한 게 아니다. 낯선 남자에게서도 어떻게든 사랑의 여지를 찾아내고야 마는, 누가 봐도 안 될 사이인데 일단 연애를 시작하고야 마는, 그래놓고 진실한 사랑이 아니라고 상처받는, 섶을 지고 불로 뛰어들고야 마는 이자벨 역시 이해 안 되기는 매한가지다.

주인공마저 이해 안 되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영화인데, 이상하게도 눈길을 뗄 수가 없다. 이자벨이 일곱 명의 남자를 만나고 헤어지며, 가끔은 양다리도 걸치며, 절망으로 고꾸라졌다가도 금세 새로운 사랑에 대한 기대로 환희에 차오르는 스펙터클한 모습을 보고 있자면, 널을 뛰는 이자벨의 감정에 관객인 나의 감정도 춤을 춘다. 열이 뻗쳤다가 키득거리며 웃다가 어이없어 화도 못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결국 피식 웃는다.

이 영화는 프랑스의 구조주의 기호학자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을 각색해 만들었다. ‘사랑의 단상’은 사랑에 관한 저자의 철학적 담론이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의 ‘말’을 글의 형식에 담은 책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말은 지극히 비이성적이고 부조리하다. 이자벨이 하는 말과 보여주는 표정이 딱 그렇다. 구경꾼 입장에서야 사랑에 목매는 이자벨이 바보천치라고 쉽게 비난할 수 있지만, 막상 사랑에 빠졌는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이자벨이 보여주는 극단적인 진폭의 감정 그래프가 지나는 어느 구간은 사랑에 빠졌던 언젠가의 내 그래프와, 바보 같았던 과거의 내 모습과 어떻게든 일치하고야 마는 것이다.

한숨 푹푹 나오는 중년여성의 사랑 찾기 실패담을 보며 몸서리치게 싫으면서도 공감할 수밖에 없는 건, 나이 들수록 아름다워지는 배우 줄리엣 비노쉬의 깊은 눈빛 탓이다. 상대 남자의 말 한 마디에 미묘하게 변하는 눈빛은 소리 하나 나지 않지만 격렬한 그녀의 감정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게 한다. 결국 그 눈빛에 설득 당하고야 만다. 이자벨이 무슨 죄겠어, 사랑이 잘못했네. 젠장.

다만, 자신에게서 빛을 발견하라는 의미의 ‘렛 더 선샤인 인’이라는 제목은 이자벨이 보여주는 사랑의 부조리함에 비해 너무 고루한, 도덕교과서 같은, 하나마나한 소리란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나 자신이 가장 소중하다는 걸 누가 모르나? 알면서도 불나방처럼 뛰어드는 게 사랑이라고, 줄리엣 비노쉬의 눈빛이 말하고 있는 걸. 젠장, 사랑이 뭐길래!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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