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한 채소나 과일은 일 년 내내 먹을 수 있다지만 엄연히 제철이 있다. 제철 먹거리는 맛과 향이 진하고 풍부하다. 신선할 뿐만 아니라 영양도 가득하고 값도 저렴하다. 제철 먹거리를 알아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시장이나 마트에 가는 것이다. 그곳에 잔뜩 쌓여 있는 채소나 과일은 대부분 제철을 맞이한 것들이다.

아보카도는 더워지기 시작하는 지금부터 여름까지 제철이다. 작년 이맘 때 난생 처음 아보카도를 구입했다. 아보카도는 멜론이나 바나나처럼 덜 익었을 때 수확해 실온에서 천천히 익혀 먹는 후숙 과일이다. 실온에 며칠 놔두면 아보카도의 겉껍질이 어두운 녹색으로 변한다. 그러면 먹을 때가 온 것이다.

ⓒ심혜진.

버터 맛이 나는 과일이라는데 맛을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 알맹이만 발라내 조금 맛을 보니 달지도 시지도 않은 밍밍한 맛이었다. 빵에도 발라보고 샐러드에도 넣어봤지만 영 입맛에 맞지 않았다. 먹는 양에 비해 아보카도는 훨씬 빠른 속도로 익어갔다. 비싼 몸값이라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보카도를 썰어 간장과 계란프라이를 넣어 비벼먹는 것이 그나마 먹을 만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아보카도와 가장 잘 어울리는 재료로 꼽은 것은 바로 명란젓이었다. 명란젓을 아보카도와 함께 밥에 비벼먹으면 그렇게 맛이 좋다는 것이다. 나는 명란젓 역시 제대로 맛을 본 적이 없었다. 생협에서 명란젓 가격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랐다. 적은 양에 왜 이리 비싼 건지. 아보카도에 실망해 소심해진 탓인지, 혹여 이것도 입맛에 맞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다. 맛없고 비싼 아보카도를 먹기 위해 또다시 비싼 명란젓을 산다는 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었다. 결국 남은 아보카도는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다시 봄이 왔다. 시장에 아보카도가 진열되기 시작했다. 작년의 기억이 떠올라 그냥 지나치고 싶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아직 맛보지 못한 명란젓과 아보카도의 조화가 궁금했다. 최고의 조합이라는 그 맛을 경험해보지 않고서 아보카도를 맛없다고 단정하는 건 어쩐지 오만하고 비겁하다는 생각을 했다. 외식 몇 번 안 하는 셈치고 아보카도와 명란젓을 구입하기로 했다.

아보카도가 검게 익어갈 때쯤 생협 물품이 집으로 배송됐다. 명란젓 한 덩이를 해동해 칼등으로 살살 껍질을 밀어 속만 발라냈다. 뜨거운 밥에 깍둑썰기를 한 아보카도를 듬뿍 올리고 명란젓 한 숟가락을 얹었다. 김 가루도 조금 뿌렸다. 슬쩍 섞어 조심스레 맛을 봤다. 눈이 번쩍 떠졌다. 아보카도가 이런 맛이었던가! 짭조름한 명란젓과 밍밍한 아보카도가 만나 서로 부족한 맛을 채워주는 동시에 새로운 맛을 만들어냈다.

많은 사람들이 추천한 데는 역시 이유가 있었다. 몇 숟가락 안 남았을 때 마요네즈를 약간 넣어 비벼보았다. 아, 이것도 신세계다. 이틀 연속 아보카도와 명란젓을 넣고 비빔밥을 만들어 먹었다. 하루 더 먹을 수 있지만 다음을 위해 아껴두기로 했다. 남은 아보카도는 상하기 전에 썰어 냉동실에 넣어두었다.

내게 아보카도는 맛없는 과일이었다. 명란젓을 알기 전까지는. 이제 아보카도는 내게 울트라초특급 수준의 최고급 비빔밥 재료다. 물론 명란젓과 함께. 무언가 더해졌을 때 최고의 빛을 발하는 것들이 있다. 회 한 점에 더한 와사비처럼, 나물무침에 떨어트린 참기름 한 방울처럼. 아보카도와 명란젓은 서로 값지게 만드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그런 존재일 거라 생각했다.

※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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