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자율학습 시간. 평소 말수가 적고 차분했던 짝이 창밖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흐리고 바람 부는 날엔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고 싶어” 그러더니 나를 획 돌아보며 말했다. “같이 나갈래?” 헉.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사납게 바람이 불고 구름이 잔뜩 긴 날엔 있던 약속도 취소하고 싶은데, 이 친구는 어느 때보다 설렌 표정이다. 물론 친구는 선생님들의 감시를 뚫고 혼날 위험을 감수하며 교실 밖으로 나갈 만큼 배포가 크지 않았다. 그 자율학습시간 내내 교문으로 향하는 넓은 길을 바라보고 또 바라볼 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누구나 맑은 날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당연했다. 구름이 없으면 비가 올 리 없으니 우산을 챙기지 않아도 되고, 신발이 젖거나 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헝클어지지도 않고, 소풍이 취소될 일도 없으니까. 무엇보다 맑은 날 온 천지에 햇볕이 내리쬔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그냥 좋았다.

사실 세상에 ‘그냥’은 없다. 햇볕을 쬐면 우리 몸에선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호르몬인 세로토닌 분비가 늘어나고, 잠이 오게 만드는 멜라토닌 분비는 줄어든다. 햇볕으로 우리 몸에선 비타민D도 만들어진다. 별다른 노력 없이 햇볕을 쬐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이유다. 이것만이 아니다. 햇빛이 없는 날, 즉 구름이 많은 날은 기압도 낮다. 기압의 변화에 우리 몸은 민감하게 반응한다. 몸속의 공기 때문이다.

압력이 높을 때 기체의 부피는 줄어들고 반대로 압력이 낮으면 기체의 부피는 커진다. 이것을 ‘보일의 법칙’이라 한다. 차를 타고 산 비탈길을 올라가거나 비행기를 탈 때면 귀가 멍멍해진다. 위로 올라갈수록 기압이 낮아지면서 귓속에 있던 공기가 팽창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침을 꼴깍 삼키면 귀 외부와 내부의 기압이 같아져 멍멍함이 사라진다. 얼굴 부위엔 공기가 많은 편이어서 두통이나 안면통을 느끼기도 한다. 보일의 법칙을 상기하며 부드러운 마시지로 통증과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만일 수술로 상처를 봉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면? 상처 부위가 욱신거릴지도 모른다. 어서 착륙해 기압이 다시 높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굳이 하늘 높이 올라가지 않더라도 구름이 많이 끼고 흐린 날은 평소보다 기압이 낮다. 몸 속 공기가 다시 덩치를 부풀릴 준비를 한다. 관절 내 조직의 공기들이 팽창하면서 뼈를 감싸고 있는 신경을 자극한다. 비가 오기 전 무릎이나 발목, 허리가 쑤시고 아픈 이유, 이게 다 보일의 법칙 때문이다. 결국 우리 몸 전체가 기압의 영향을 받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흐리거나 비가 오는 날엔 대부분 기분이 울적해진다. 이럴 땐 집에서 맛있는 것 먹으면서 쉬는 게 제일 좋겠지만 그러긴 쉽지 않다. 그래도 날씨와 우리 몸의 관계를 이해하면 그 시기를 지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20여 년 전, 기분이 좋지 않았던 스무 살의 어느 여름날 길을 걷고 있었다. 그날따라 장마구름에 꽉 막힌 하늘이 답답하기는커녕 내게 뭔가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았다. 구름이 내게만 드리운 게 아니라는,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다는, 구름 뒤엔 해가 반짝 빛나고 있다는 메시지가 내게 와 닿는 듯했다. 세로토닌이 줄어든 만큼, 내 안의 깊은 우울을 마주할 수 있었던 그날, 고등학교 때의 짝이 떠올랐다. 세상엔 맑은 날을 좋아하는 사람과 흐린 날을 좋아하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는 걸 새삼 생각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언니에게 이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언니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날씨 때문에 기분이 달라진다고? 말도 안 돼. 나는 날씨 때문에 기분이 바뀌진 않는데” 헉, 세상엔 세 종류의 사람이 있구나. 맑은 날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흐린 날이 좋은 사람, 그리고 날씨 따윈 상관하지 않는 사람.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저작권자 © 인천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