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시민기자의 영화읽기 - 판타스틱 우먼 (Una mujer fantastica)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2018년 개봉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밤에는 재즈 바 가수로 일하는 마리나(다니엘라 베가)의 생일. 연인 오를란도(프란시스코 리예스)는 멋진 중국식당에서 깜짝 생일파티를 연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이과수폭포에 함께 가기로 한 약속은 세상에 둘도 없는 생일선물이다. 행복한 생일 밤을 보내고 잠든 마리나는 잠결에 고통스러워하는 오를란도의 신음소리에 잠이 깬다. 이상하다는 말만 웅얼거리며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오를란도를 부축해 급히 병원으로 옮기지만, 오를란도는 끝내 숨을 거둔다.

함께 살던 연인이, 뜨겁게 사랑을 나누고 옆에서 잠들었던 연인이, 갑작스레 죽었다. 보통의 경우라면 연인의 죽음에 목 놓아 울며 애도의 시간을 보내야 마땅했겠지만, 마리나는 슬퍼할 겨를이 없다. 그녀의 남다른 외모에 경계심을 보이던 의사는 경찰을 부르고, 경찰은 마리나를 피의자 취급한다. 오를란도의 전 부인과 아들은 전 남편과 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켰던 연인인 마리나에게 비수를 꽂고, 그들이 부른 성범죄 전문 수사관은 수사권을 무기로 마리나를 모욕한다. 이유는 단 하나. 마리나가 트랜스젠더 여성이기 때문이다.

세바스티안 렐리오 감독의 ‘판타스틱 우먼’은 연인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라는 우연한 사건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난 트랜스젠더 혐오, 동성애 혐오를 다룬 영화다. 오를란도가 죽은 마리나의 생일부터 오를란도의 장례식까지 며칠 되지 않는 영화의 시간은 마리나의 수난으로 점철돼있다. 마치 온 우주가 마리나를 괴롭히기로 작정이라도 한 듯 눈을 떠 일어나서부터 잠자리에 들기까지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녀를 의심하고 모욕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만으로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고통인데, 그녀는 마음껏 슬퍼할 수도 목 놓아 애도할 수도 없다. 그녀에게 애도는 트랜스젠더 혐오라는 커다란 장애물을 넘어선 다음에야 가질 수 있는 어마어마한 사치다. 연인을 잃은 마리나를 위로하기는커녕, 하나같이 모욕을 주며 묻는다.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물론 마리나에 대해 알고 싶다는 순수한 호기심일 리는 없다. 그 질문은 질문이 아니라 마리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영화 제목 ‘판타스틱 우먼’은 ‘환상적인 여자’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옳겠지만, 마리나를 대하는 세상의 시선을 보면 ‘환상적’이라기보다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게 지워 없애고 싶은 여자’로 해석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마리나를 대하는 의사와 경찰, 오를란도의 가족들에게서 세상이 정해놓은 ‘정상’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 마리나를 끝내 인정하고 싶지 않은 폭력적인 욕망이 읽힌다.

그러나 마리나는 꼿꼿이 허리를 펴고 혐오에 맞서 존엄을 지킨다. 그녀가 겪은 고난은 카운터테너의 신비로운 목소리가 돼 무대를 가득 채운다. 그래, 고난을 아름다운 예술로 승화시킨 마리나야말로 ‘환상적인 여자’가 맞다. 실제 트랜스젠더 여성이자 오페라 가수인 다니엘라 베가가 연기한 마리나의 무대를 본다면, 아마 ‘환상적인 여자’라는 제목에 고개를 주억거리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애도할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애도의 자격을 의심받는 것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것과 같다. 고백하자면, 2014년 4월 16일 이후 모든 영화에서 세월호 참사를 떠올리는 증세가 생겼다. 이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언제까지 세월호 타령이냐고 비난하던 목소리가 애도의 권리를 짓누르고, 뭔가 속셈이 있는 것 아니냐는 의심이 애도의 자격을 심사하던 참담함을, 마리나를 보며 다시 느낀다.

애도의 자격은 인간의 자격이다. 누가 누구에게 인간의 자격을 운운할 수 있는가. 마리나가, 트랜스젠더의 존재가 여기 있다. 실재하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은 어떤 화려한 수사를 갖다 붙인다 해도, 폭력일 뿐이다. 혐오일 뿐이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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