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 말> 1950년생 전쟁둥이인 이입분(69)씨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우물물부터 프랑스 산 ‘에비앙’ 생수까지 모두 맛본 세대다. 그가 온몸으로 통과한 현대생활사를 물건으로 되짚어보려 한다. 이입분씨는 내 엄마다.

아파트 1층 입구에 안내문이 붙었다. 집안에 있는 수도계량기를 지하로 옮긴다는 내용이었다. 집집마다 화장실에 수도계량기가 있다 보니 매달 마지막 날이면 한 달 동안 사용한 수돗물 량을 현관문에 적어 놓아야했다. 힘든 일은 아니지만 잊지 않기 위해선 꽤 신경을 써야 했다. 번거롭던 차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대신 공사를 하는 날엔 단수가 될 예정이라 했다. 공사 전날 제일 큰 통에 물을 받아 놓고 공사 당일 아침 일찌감치 머리를 감았다.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줄 알았는데, 아뿔싸. 마실 물이 없었다. 정수기 물을 받아 놓을 생각을 미처 못 했다. 물이 없으니 목이 더 말랐다. 고양이 물그릇에 담긴 물을 조금 마셔도 별 문제는 없겠지, 잠시 고민하기도 했다.

다행히 오전에 시작한 공사는 한 시간 만에 끝났고 곧장 단수도 해제됐다. 시원하게 물을 한 잔 마시며 생각했다. 아주 잠깐 동안 단수가 돼도 이렇게 불편한데 수도가 없을 땐 어떻게 살았지? 우물물을 길어 먹고 살았을까? 엄마에게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물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생각하면 눈물 나” 엄마는 물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목소리를 높였다.

“어렸을 때 집이 한두 채만 있는 외딴 곳에 살았어. 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서 그 물로 밥도 해먹고, 빨래도 했지. 겨울이 되면 흘러 내려오는 물이 적어지고 얼기도 해. 얼음 깨가면서 쓰느라 고생을 했지. 그러다가 집들이 모여 있는 마을로 이사를 오니까 우물이 있더라고. 근데 집에서 우물까지 한 200미터쯤 가야해. 빨래할 거 다라이(대야)에다가 담아서 이고 다녔어. 채소 같은 것도 우물가에서 많이 씻었고. 집에서 쓸 물은 우물에서 집까지 길어 왔지”

물을 길어 왔다는 이야기에 나는 잠시 아득해졌다. 20여 년 전 스무 살 때, 그날 집에 나 혼자 있었다. 며칠 째 단수가 된 상황이었다. 해질 무렵 밖에서 방송이 들렸다. 급수차가 왔으니 물을 받아가라는 거였다. 언제 물이 다시 나올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섯 식구가 쓸 물을 최대한 많이 받기 위해 통이란 통은 죄다 들고 나갔다. 늘어선 통들에 물이 가득 찼다. 이제 집까지 가지고 가는 일만 남았다. 우리 집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빌라 3층. 물은 생각보다 아주 무거웠다. 못해도 열 번은 1층과 3층을 오가며 물을 날랐다. 나중엔 팔다리가 후들거려 물을 계단에 쏟을 뻔했다. 그날 저녁 밥숟가락이 흔들려 국을 떠먹지 못했다. 아주 억울하게도 물은 그날 밤부터 콸콸 나왔다.

일생에 단 한 번이었지만 물을 옮겨본 사람으로서, 물을 지고 나르는 고생스러움을 알 것 같았다. 200미터나 되는 거리를 도대체 몇 번이나 오간 걸까.

“하루에 적어도 두세 번은 다녔지. 그냥 매일 다녔어. 부엌에 커다란 물 항아리를 묻어두었거든. 거기에 물을 부어 놓고 쓰는데 좀 비었다 싶으면 니 외할머니랑 나랑 틈만 나면 물지게를 지고 물을 날랐지. 긴 나무 양쪽 끝에 빠께스(양동이)를 매달고 물을 반쯤 채워. 가득 채워도 걷다 보면 어차피 다 튀어 나와. 물이 무거우니까 당연히 어깨도 아프고 힘들지. 그래도 우물물이 잘 길어지면 마음이 놓였어. 우물이 마를 때도 있거든. 그러면 계곡이고 어디고 멀리까지 물 찾아다니느라 난리야. 나무 하러 다닌 거랑 물지게 진 거는 너무 고생스러워서 지금도 잊히지가 않아”

식수 전쟁에 살인까지…심각한 물 부족

평소 수돗물을 자유롭게 쓰기 때문에 잘 느끼지 못하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심각한 물 부족 국가 중 하나다. 옛 기사를 보면 정말 그렇다는 걸 실감할 수 있다. 상수도로 각 가정에 물이 공급되기 전까지 특히 여름철이면 물 부족이 심각했다.

‘몇 달 동안의 한발로 인하여 공동우물이 고갈하여 일대 물소동이 벌어지고 있다. 광주 시내 공동우물은 260개소인데 그 중 90개소가 고갈하여 주부들의 아우성은 날로 높아가고 있다’(동아일보 1955.5.19.)

‘우물물에 의존하는 삼양지구를 보면 전 가족이 동원되어 물을 찾아 해매다 고지대 주민들은 물 한 지게를 겨우 얻는 실정이고 깊이 5미터 되는 산마루 향나무 우물이라는 이름 있는 수원도 바닥이 드러날 정도다. 변두리 식수난에 깜짝 놀란 서울시는 지난 15일부터 소방차 다섯 대를 동원, 급수 작전을 폈지만 이 물 얻기에 주민들이 아우성이다’(경향신문 1965.5.26.)

서울 지역은 한강을 수원으로 해 물 부족이 덜했지만 서울 주변 지역은 1950년대에서 1970년대까지 거의 매해 가뭄에 시달렸다. 너도 나도 물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위기를 기회로 삼은 이들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었다.

‘이 틈에 앉아서 돈 버는 사람도 생겼다. 가뭄소동으로 홍제동 논골약수터 주인 신봉원 여인은 약수물 한 지게에 2원씩 받고 하루 종일 팔아 수입이 만만치 않다고. 돈 있는 주민들의 물은 이 약수터가 대었다. (중략) 돈 있는 사람은 그나마 물을 사먹지만 산꼭대기에 사는 많은 주민들은 한 달에 20~30원씩 내고 비위생적인 펌프 물을 얻으려고 장사진을 치고 있다’(경향신문 1965.6.2.)

1970년에도 ‘식수 전쟁’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물 부족이 심각했다. 공동수도에서 물을 받으려고 밤샘을 하는가 하면 몇 백 미터씩 물통이 줄을 이었다. 개인 소유의 우물에서 물 한 지게의 가격은 50원으로 껑충 뛰었다.(경향신문 1970.6.16.)

급기야 사람이 죽고 다치는 일까지 벌어졌다. 서울의 어느 집 마당에 수돗물을 길러 온 이웃 주민과 집주인의 아들이 말다툼을 벌이다 이를 말리던 집주인을 밀어 뇌진탕으로 숨지게 했다. 당시 그 일대에서 수도가 놓인 곳은 그 집뿐이었다. 물이 나오는 집도 그 집이 유일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며칠 동안 이 수도를 이용해오던 중 어느 주민이 물을 받으러오자 집주인 아들이 “돈 주고 수도를 놓은 사람도 제대로 물을 못 먹는데 왜 자꾸 와서 귀찮게 구느냐”고 말을 한 것이 싸움의 발단이었다. 결국 물을 얻으러 왔던 주민은 폭행치사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경향신문 1970.6.1.)

우물에서 끊이지 않은 사건사고

1981년 상수도 급수율이 57퍼센트를 달성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지역에선 우물을 이용했다. 두레박을 대신해 펌프를 달면 힘을 덜 들이고도 물을 퍼 올릴 수 있었다.

우물가는 주부들이 모여 일하며 정담을 나누는 장소였지만 으스스한 사고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선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우물을 파다가 흙벽이 무너져 매장당하거나 (경향신문 1955.9.28.) 발을 잘못 디디어 실족사 하거나(동아일보 1962.8.18.) 동네 사람에게 나쁜 감정을 품고 우물에 석유를 쏟아 붓거나(경향신문 1955.2.22.) 친구를 죽여 우물에 빠트리기도 했다.(동아일보 1957.11.15.)

가슴 아픈 사연도 있다. 1952년 9월 25일 <동아일보>에 며칠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굶고 있던 한 여성이 두 아이와 함께 세상을 뜨기로 마음을 먹고 여덟 살 된 아이를 먼저 우물에 던졌다. 남은 아이를 잡으려는 순간, 아홉 살인 아이가 “엄마, 밥 달라고 않을 테니 우물에 빠트리지 마세요”라고 애원했다는 것이다. 이 여성은 결국 아이를 안고 우물가에 쓰러져 실신했다. 이 기사는 “어린 생에 대한 애원이 세상을 울리고 있다”며 당시 농촌의 식량난이 심각했음을 알리는 일화로 소개됐다.(동아일보 1952.9.25.)

몹시 안타깝지만 어쩐지 낯설지 않다. 2014년 서울 송파 세 모녀가 생활고로 고생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최근엔 충북 증평에서도 어렵게 생활해가던 모녀가 숨졌다. 한국전쟁 시기에 벌어진 일이 국민소득 몇 만 불을 바라보는 시대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해석하면 좋을지 난감하다.

이런 영향인지 가까이 있으면 편리한 우물을 집집마다 파기를 꺼리기도 했다. 1965년 5월 29일 <경향신문>엔 전북에 사는 한 주부가 기고한 글이 실렸다.

‘어디든지 땅을 파기만 하면 물이 솟는다는 이 마을에 50여 가구 가운데 단 한 집도 자가용 우물을 갖고 있지 않으며, 단 하나의 공동우물을 사용하고 있으니 참 이상한 일이다. 집안에 샘이 있으면 귀신이 나온다는 미신 때문이란다. (중략) 문제는 공동우물이 음료수로 쓰기에 얼마나 비위생적인가 하는 점에 있다. 우물이 깊고 넓고 바가지로 뜰 수 있는 것까지는 좋으나 워낙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위생관념도 없이 함부로 쓰기 때문에 지푸라기나 채소 나부랑이가 떠도는 것은 오히려 약과요 요강이나 기저귀 같은 것을 예사로 들고 온다. 어떤 수단을 쓰든지 집안에 펌프나 우물을 마련하기 전엔 먹은 음식이 살로 가지 않을 것만 같다’

우물은 수질과 위생상태가 늘 문제였다. 같은 우물물을 먹는 동네 주민들이 집단으로 장티푸스나 이질에 걸리는 일이 종종 일어났다. 특히 장마가 지나간 뒤엔 나라에서 우물을 소독하라는 지시가 내려올 만큼 심각했다. 소독법으로는 클로르칼키(차아염소산칼슘)라 부르던 염소 소독제를 우물이 집어넣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소독한다고 해서 수질까지 좋아질 리 없었다. 1969년엔 식용으로 부적합 판정을 받은 공동우물 3000여개를 완전 폐쇄하기도 했다.

일본인을 위한 수도시설, 그마저 전쟁으로 파괴돼

우리나라에 처음 수도가 놓인 것은 대한제국기인 1908년이다. 서울의 4대문 안과 용산 일대에 식수를 공급하는 공용수도였다. 물장사들이 물을 받아 집집마다 배달하고 물 사용료를 받으면 일부를 상수도 회사에 납부하는 방식이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은 대도시를 중심으로 상수도를 설치했는데 이는 일본인 이주자를 위한 것이어서 한국인은 거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부분 파괴됐다.

전쟁 직후 산업화,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도시로 인구가 물밀 듯 들어왔다. 우물로는 식수를 감당할 수 없었다. 도시민들에게 안정적으로 물을 공급하기 위해, 물로 옮기는 전염병을 막기 위해 상수도 시설 확충이 시급했다. 그러나 대규모 상수도 시설을 지을 여력이 없어 결국 외국의 원조를 받았다. 이후 상수도 급수율은 1960년 22%, 1971년 36%(144개 도시 1160만명), 1976년 56%, 1981년 57%가 됐다. 2014년 우리나라 상수도 보급률은 98% 이상이다.(출처 ‘기록으로 만나는 대한민국 70년-상수도’)

내가 버린 물의 행방은?

적어도 ‘내가 쓸 물’은 부족하지 않게 살고 있으니 물이 어디에서 오는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다. (물론 그래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언제부턴가 내가 사용한 물들이 과연 어디로 흘러가는지 알고 싶었다. 우물물을 긷던 시절엔 이 모든 것이 눈으로 빤히 보였겠지만 지금은 싱크대 아래로, 세면대 아래로, 변기 아래로 사라지고 만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세상에서 자취를 감춘 건 아닐 텐데 나는 아무 고민 없이 흘려보내고 잊는다. 그래도 될까. 확신이 없다. 그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물을 썼는데도 사라지지 않고 오늘도 수도관에서 물이 콸콸 쏟아지는 걸 보면 내가 버린 물이 다시 내 입으로 돌아오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내가 버린 물, 그것이 궁금하다.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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