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 채소들이 나오면서 냉장고에 빈틈이 사라지고 있다. 지난달에 이미 미나리와 샐러리로 장아찌를 담갔다. 달래 두 묶음을 사 와 양념간장도 한 통 만들었다. 짜디짠 장아찌에 매실청ㆍ레몬청ㆍ청귤청ㆍ사과청 등 각종 과일청까지, 냉장고 칸칸이 차지하고 있다. 이 많은 걸 누가 다 먹으려는지 만드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일단 만든다. 지금은 오이 값이 내려가길 기다리고 있다. 여름밥상을 채워줄 장아찌와 피클을 만들어야 하니까.

열거한 식품의 공통점은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점이다. 만든 지 만 3년이 다 되어가는 깻잎장아찌는 여전히 특유의 향을 간직하고 있다. 아무리 냉장고에 두었다고 해도 그렇지, 썩기는커녕 이렇게까지 멀쩡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살아있던 것이 생명을 다하면 썩는 것이 자연의 이치다. 썩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해로운 물질이 만들어지는 것을 부패, 반대로 이로운 물질이 생기는 것을 발효라고 한다. 부패와 발효를 일으키는 것은 미생물이다.

미생물은 너무 작아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이라는 뜻이다. 1600년대 후반 현미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사람들은 미생물의 존재를 전혀 알지 못했다. 전염병을 비롯해 각종 질병이 악마의 영혼 때문에 생기는 것이라 믿었다. 이후 여러 실험으로 미생물은 살아있는 생물이나 생명이 없는 사물, 땅 속과 땅 위, 물속, 공기 중 등 세상 어디에나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심지어 우리 몸을 이루는 세포 수보다 몸 안에 살고 있는 미생물의 수가 훨씬 더 많을 정도다.

음식도 미생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 재료를 깨끗이 씻는다 한들 미생물까지 박멸할 순 없다. 미생물은 습기가 많고 따뜻하고 통풍이 안 되는 환경에서 잘 산다. 음식이 부패되지 않게 하려면 미생물이 살기 힘든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우리 조상들은 미생물의 존재는 몰랐지만 미생물로부터 음식물이 상하지 않게 하는 방법만큼은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것은 말리는 것이었다. 식품을 말리면 미생물이 활동할 수 없어 오래 보관할 수 있다. 하지만 습도와 온도가 높은 지역에선 이마저 무용지물이다.

이런 지역에선 염장법이 발달했다. 소금은 삼투압으로 식품 속 수분을 밖으로 나오게 해 건조에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미생물 몸속의 수분도 빼내 미생물을 파열시켜버린다. 더운 지역에서 생선으로 만든 젓갈이 발달하고, 이 젓갈을 각종 음식에 많이 넣는 이유와 연결된다. 설탕이나 꿀 속에 음식을 넣어 보관하는 당절임도 같은 원리지만, 설탕과 꿀은 소금에 비해 값이 훨씬 비싸다. 설탕을 사용해 잼이나 청을 만드는 방식은 최근에 발달한 조리법이다.

훈연법도 있다. 나무가 탈 때 나오는 연기 속에는 페놀화합물이 들어 있다. 고온의 열기에 미생물이 죽고, 페놀화합물이 식품 표면에 들러붙어 미생물의 번식을 막는다. 페놀화합물은 훈제 특유의 맛과 향을 내는 물질이기도 하다.

산을 이용해 부패균이 성정하는 것을 늦추거나 막는 방법도 있다. 예를 들어 김치는 만든 직후부터 발효를 돕는 균이 유산을 배출해 부패균이 성장하는 것을 막는다. 대신 유산 때문에 신맛이 생긴다. 아예 산을 직접 넣기도 한다. 피클이나 장아찌에 식초를 넣어 산성도를 높여 부패균이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3년 된 깻잎장아찌는 소금ㆍ간장ㆍ식초ㆍ설탕으로 만든 짜고 시고 달달한 양념장 속에 푹 잠겨 있다. 미생물이 살아날 희망이 전혀 없다. 날도 따뜻해졌으니 조만간 베란다에 신문지를 깔아야겠다. 그리고 삼겹살을 구워야겠다. 바싹 구운 삼겹살을 잘 감싸주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집 깻잎장아찌에게 내려진 숭고한 사명이니까.

※이 글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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