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문서를 은닉ㆍ탐독ㆍ유포한 학생은 최고 퇴학 처분할 수 있다’ ‘불건전한 이성교제로 풍기문란을 일으킨 학생은 최고 출석 정지, 동맹휴학을 선동하거나 동참한 학생은 최고 퇴학 처분할 수 있다’ ‘불온동아리를 신고한 학생에게 상점을 준다’

불온문서, 불온동아리, 동맹휴학. 풍기문란. 1960~80년대 군사독재 시절에나 들었던 말들이다. ‘불온하다’는 통치계급이나 기성세력의 입장에서 보아 온당하지 않다는 의미다. 군사독재정권이 민주화와 통일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쓴 말들이란 걸, 그 시대를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케케묵은 표현과 징벌 규정이 학생인권과 국민주권을 강조하는 지금, 인천의 중ㆍ고등학교 학생생활규정 조항으로 버젓이 남아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학교장의 허가 없이는 학생이 대외 행사에 참가할 수 없고, 남녀학생 단 둘이 개방되지 않은 장소에서 만나면 안 된다. 빨강ㆍ노랑ㆍ파랑 등 원색 운동화와 가방을 착용하면 안 되고, 토시나 장식이 많은 양말을 착용해도 안 된다. 스타킹은 검정색ㆍ살색ㆍ커피색만 가능하다. 한겨울에도 치마 속에 체육복을 입어선 안 된다. 임신한 학생을 징계한다는 조항도 있다. 한두 학교 이야기가 아니다.

학생생활규정은 학생들이 학교라는 공간에서 집단생활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다함께 지키기로 정한 사항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러나 학생들은 규칙을 만들 때부터 배제됐다. 학교 관리자와 교사들이 학생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한 잣대와 수단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학생들은 규칙을 왜 지켜야하는지 잘 모른다. 대부분 꾸짖음과 징벌을 피하자는 생각뿐이다.

지난해 충북에 있는 한 대안학교에선 학생들이 총회를 열어 생활규칙 백지화를 결정했다. 규칙 위반이 반복되고, 전자기기 사용 규제처럼 시대 흐름에 걸맞지 않은 사항도 있고, 무엇보다 규칙을 왜 두고, 그걸 꼭 지켜야하는 이유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다는 판단에서였다. 학생들은 몇 개월 동안 규칙 없이 지내면서 공동체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사항들을 다시 토론해 규칙으로 만들었다.

지난해 인천에서도 학생들 스스로 토론해 생활규정을 개정한 학교가 있다. 학생회 임원 탄핵 조항을 신설하기도 했고, 소지품 검사와 휴대폰 수거와 관련해 학생들 의견을 반영해 개정했다. 학생들을 지도와 통제의 대상이 아닌, 권리의 주체로 보고 믿어준 결과다.

개헌 논의가 한창이다. 개헌하려는 주된 이유는 30년간 유지되고 있는 87년 헌법이 지금의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낡은 학생생활규정도 같은 이유로 바꿔야한다. 학생들이 자율성과 창의적 사고를 키우고, 민주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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