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보화
번역가
내 삶은 영어와 친하지 않았다. 학창시절 외국어 배우기를 좋아했지만 사실 영어에는 유달리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오만함이 못마땅했고 그 특유의 ‘빠다’ 발음이 비위에 안 맞았다. 그나마 마음잡고 영어를 들여다 본 것은 내 나이 서른이 다 되어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면서였다. 어쩌다보니 영어로 된 미술책을 공부하면서 그 책들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삶이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사람들은 영어로 된 책을 번역한다고 하면 내가 굉장히 영어를 잘 할 거라고 짐작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번역에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오히려 우리말 실력이다. 어쨌든 영어를 읽고 이해하기는 해도 듣고 말하는 것은 신통치 않다. 그렇다고 주눅 들거나 불편한 것은 아니다. 필요하면 언제든 배우면 그만이니까. 모름지기 배움이란 자기가 배우고 싶을 때 필요한 만큼 배우고 익히면 되는 것이지 남이 한다고 무조건 따라할 일은 아니니 말이다.

사는데 그 정도 배짱은 있어야하지 않나.
요즘의 영어광풍을 보면 마음 심난하기 그지없다.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면서 영어 사교육시장이 뜨거운 호황을 누리고 있다. 영어몰입교육이니, 영어전용교실이니 하는 말들이 안 그래도 불안한 부모들의 심리를 부추기면서 학원으로 아이를 보내는 시기가 갈수록 앞당겨지고만 있다.

언어학자들은 아이가 일상에서 이중언어에 노출된 환경이 아니고서는 외국어 조기교육이 별다른 효과가 없을뿐더러 아직 모국어가 완성되지 않은 시기의 외국어 교육은 아이의 언어발달에 커다란 혼란을 야기한다고 연구 보고했다.

즉 조기교육보다는 오히려 모국어 문법체계가 어느 정도 완성된 시기,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의 시기에 체계적으로 외국어를 습득할 때 더욱 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일찍, 조금 더 많이 노출시키면 영어를 더 잘 할 수 있다는 몇몇 학자와 사교육계의 잘못된 신화로 인해 한참 엄마와 알콩달콩 말을 주고받을 시기에, 엄마의 입모양을 보고 그 소리를 듣고 우리말을 배워야 할 시기에, 아기들에게 영어책을 읽어주고 혼자 앉아 영어비디오를 보게 하니 정말 갑갑한 일이다. 요즘 영어 때문에 마음이 아파 병원을 찾는 아이들이 부쩍 늘었다 한다.

당당하게 말하지만 초등학교 5학년이 되는 우리 큰 아이는 아직 알파벳도 잘 모른다. 그렇지만 난 그 아이의 영어실력이 걱정되지 않는다. 아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자기 생각을 제대로 우리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는지가 내겐 더 중요할 뿐이다.

난 우리 아이가 영어를 배우고 싶을 때 자기가 그것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 충분히 배워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 아이에 대한 신뢰이기도하다. 설사 영어 좀 못하면 또 어떤가? 대한민국 모든 국민이 영어를 다 잘해야 하나? 일상에서 거의 영어를 사용할 일이 없는데 왜 국민 모두가 이렇게 영어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하는가? 그 놈의 영어 때문에 부모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아등바등하고, 아이들은 놀지도 못하고, 가족이 생이별하고, 영어점수가 한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유일한 잣대가 된 이 현실이 난 너무도 슬프다. 대체 영어가 뭐 길래. 

영어가 그저 의사소통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부와 성공을 위한 하나의 기준이 되어버린 이 현실에서 부모들이 영어에 대한 불안감과 열등감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

하지만 부모로서 우리가 잘못된 사회적 기준에 마냥 휘둘릴 것이 아니라 좀 줏대를 가지고 우리 아이들을 지켜주고 이끌어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저 학원에 아이를 내맡기는 것만이 부모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방법일 수는 없다.

영어는 절대 삶의 목적이 아니다. 곰곰이 따져보자. 과연 영어를 잘한다는 게 무언지, 원어민 발음으로 유창하게 말하는 게 그토록 중요한지 말이다. 말은 소통이고 중요한 건 화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다. 아무리 발음이 좋으면 뭐하나. 진실이 아니라면, 통찰력이 없다면,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관심이 없다면. 언어는 발화자의 품성과 인격, 지식 그 모두를 담고 있다.

그러니 언어는 만학이고 한 사람의 총체적인 세계관이기도하다. 좀 어눌하더라도 진심이 담긴 말에 우리는 본능적으로 끌린다. 그러니 영어를 잘 구사하기 위해 다른 모든 것을 포기하는 요즘의 행태는 엄청난 모순이다. 아이가 영어를 잘하기 위해서는 먼저 좋은 인격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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