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투데이] 1930년대 초ㆍ중반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사람,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그와 관련한 사건 중 하나로 ‘조선공산청년동맹 재건 사건’이 있다. 1934년 10월 10일 기사에는 1931년 6월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공산청년동맹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정태옥ㆍ강목구ㆍ오기섭이 각각 경성ㆍ함흥ㆍ부산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에 나선 내용을 전하면서 인천도 언급하고 있다.기사를 보면, 정태옥이 인천을 왕래하면서 신수복(愼壽福)ㆍ우종식(禹鍾植)ㆍ이억근(李億根) 등과 접촉해 1932년 8월 1일 ‘반전(反戰)
[인천투데이] 19세와 18세인 인천 청년 두 명이 1932년 11월 30일 전후에 학업을 위해 머문 평양에서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같은 날 경찰서에서, 형무소에서 찍은 사진을 남긴 이 둘은 우종식(禹鍾植)과 이억근(李億根)이다.‘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1913년 1월 5일 출생으로 기재한 우종식의 본적과 출생지는 인천부 화정(花町) 1정목(丁目) 91번지이고, 주소는 평양사범학교기숙사이다.1914년 7월 생으로 카드가 모두 세 장 있는 이억근의 주소는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면서 생긴 시간차 때문에 평양사범학교 기
세 마리의 까마귀. 시나 소설 제목이 아니다. 인천이 겪은 아픈 역사의 한 장면을 보여주는 말이다. 1949년 3월 31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인천조사부에 무기명 투서 한 통이 접수됐다. 당시 송림동 226번지에 거주하는 전모 씨의 행적을 고발하는 내용이다.이 투서에 따르면, 이 사람은 일제강점기 인천경찰서 고등계 형사로서 ‘소위 사상범이라 하는 조선애국지사를 검거ㆍ투옥ㆍ치사케’ 했으며, ‘조선어를 사용한 학생을 유치ㆍ투옥’하고, 인천상업학교 학생 27명을 검거해 충청북도 영동(永同)형무소에 넘겨 2년 가까이 수형생활을 하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