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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인천의 항일운동가를 좇다보니 10대 후반에서 20대 초ㆍ중반 청년ㆍ학생이 중심이었다. 해방 후 반독재투쟁에서도 대학생과 청년노동자들이 선두에 섰으니, 시대는 달라도 연령으로 보면 무척 자연스럽다.일제강점기 인천의 청년운동, 항일운동에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두 분 있다. 언론인이자 사회운동가인 박창한(朴昌漢)과 최진하(崔晋夏)다. 1900년 전후에 태어난 이들이 1920년대 중반 청년ㆍ사회운동을 본격적으로 열었다면, 그들보다 적어도 10여 세 연상인 두 사람은 때로는 앞에서, 때로는 뒤에서 청년들이 의지하는 존재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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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2019.11.18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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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1930년대 초ㆍ중반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려는 움직임이 여러 사람, 여러 방면에서 나타났다. 그와 관련한 사건 중 하나로 ‘조선공산청년동맹 재건 사건’이 있다. 1934년 10월 10일 기사에는 1931년 6월 소련 모스크바의 국제공산청년동맹으로부터 지령을 받은 정태옥ㆍ강목구ㆍ오기섭이 각각 경성ㆍ함흥ㆍ부산을 중심으로 조직 활동에 나선 내용을 전하면서 인천도 언급하고 있다.기사를 보면, 정태옥이 인천을 왕래하면서 신수복(愼壽福)ㆍ우종식(禹鍾植)ㆍ이억근(李億根) 등과 접촉해 1932년 8월 1일 ‘반전(反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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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2019.11.0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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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인천의 노동운동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동방(東紡)’이란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1930년대 동양방적(東洋紡績)으로 시작해 1950년대 동일방직(東一紡織)으로 이어지며 일제강점기와 1970년대 노동운동의 상징이 된 공장이다. 국적과 시간을 달리한 회사였으나, 공장 터와 노동자의 처지는 같았다. 다른 이름의 두 회사를 줄이면 모두 ‘동방’이 되니 우연이라기엔 기이하다.1935년 4월 4일, 경기도 경찰부장은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등에게 ‘인천 적색(赤色)그룹 사건 검거에 관한 건’이란 비밀 보고 문서를 보낸다. 이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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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2019.10.2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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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1936년 9월 10일, 지금은 인천 남동구 수산동인 남동면 발산리 288번지 최춘문(崔春文)의 집에 인천경찰서 형사들이 들이닥쳤다. 집안을 뒤져 좌익서적을 찾아냈고, 21세 청년 최춘문은 꼼짝없이 연행됐다.‘어린이에게 불온사상 고취, 인천야학교사 사건’이란 1936년 9월 23일 기사 제목처럼 자신이 교사로 근무하던 발산리 농촌진흥회 부설 야학교에서 빈부격차 문제 등을 14세 이하 어린이에게 가르친 혐의였다.부친이 규모 있는 자작농으로 중류층 이상의 생활을 했고, 최춘문을 야학교사로 추천해 채용한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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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2019.10.07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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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1933년 4월 30일 새벽 5시 30분 무렵, 현재 동인천 이마트 부근인 인천부 화정(花町)의 조선정미소 창고와 오쿠다(奧田)정미소 창고 사이에서 “우리가 기념할 5ㆍ1절 메이데이가 왔다. 메이데이는 전 세계 노동자ㆍ농민의 일치단결로 우리를 속박하는 쇠사슬을 끊어내기 위해 전 세계 자본가놈들의 간담을 서늘케 한 국제적 시위일이며 투쟁일이다”로 시작하는 격문 100매 한 묶음을 경계 중이던 인천경찰서 형사가 발견했다.격문 명의가 ‘적색노동조합 기관지’였으므로, 인천경찰서는 일회성 격문 살포가 아니라 비밀조직이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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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2019.09.23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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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1930년 3월 1일을 전후해 ‘3ㆍ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격문을 인천 시내에 뿌리고, 경성에서 우편으로 전국 노동ㆍ청년단체에 발송하려던 사건이 있었다. 이미 소개한 김점권과 이두옥이 관련된 사건이다. 이 사건에 가담해 체포된 이들 중에 26세 청년 한 명이 있다. 이수봉(李壽奉)이다.이수봉 관련 ‘일제 감시대상 인물카드’가 모두 세 장 있는데, 이수봉은 1905년 2월 7일생으로 본적과 출생지는 인천부 외리(外里) 95번지, 주소는 인천부 화정(花町) 1정목(丁目) 20-19번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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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9.0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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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19세와 18세인 인천 청년 두 명이 1932년 11월 30일 전후에 학업을 위해 머문 평양에서 경기도 경찰부 형사들에게 체포됐다. 같은 날 경찰서에서, 형무소에서 찍은 사진을 남긴 이 둘은 우종식(禹鍾植)과 이억근(李億根)이다.‘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1913년 1월 5일 출생으로 기재한 우종식의 본적과 출생지는 인천부 화정(花町) 1정목(丁目) 91번지이고, 주소는 평양사범학교기숙사이다.1914년 7월 생으로 카드가 모두 세 장 있는 이억근의 주소는 체포와 수감을 반복하면서 생긴 시간차 때문에 평양사범학교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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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2019.08.19 1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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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권충일(權忠一)이란 사람이 있다. ‘일제감시대상 인물카드’에는 1905년 7월 16일생으로, ‘용의조선인 명부’에는 1907년 7월 22일생으로 나온다. 본적은 인천부 신화수리 196번지이고 출생지는 강화군이다.1934년에 인천의 노동조합 임원이었다. 일제 경찰문서에 따르면, 1931년에 적색노동조합을 설립하기 위한 일환으로 정미직공 야체이카(세포조직)를 조직하고 책임자로 일했으며, 인천 청년 이홍순에게 모스크바 공산대학 입학을 권유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보내기도 했다.1930년 3월 14일 기사를 보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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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05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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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1930년 2월 28일 이른 아침, 인천지국과 인천공립보통학교 등 현재의 중구와 동구 일대에 ‘3ㆍ1운동 11주년 기념을 맞아 전조선 민중에게 격함’이란 제목의 유인물이 뿌려졌다.“3ㆍ1운동도 11년을 경과했다. 그러나 지금 도리어 일본제국주의의 압박과 착취는 그 정도를 더하고 있어 2000만 생령의 고통과 비애는 극에 달해 있다. 보라! 저 놈들의 은행, 회사, 상점과 수리조합 및 농장의 발전?확장을! 그리고 우리 도시, 농촌의 파멸, 실업자와 빈민굴의 증가, 소작농민의 빈곤격화를! 피땀을 흘리며 노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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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7.22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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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역사의 큰 수레바퀴는 대중의 조직적 단결과 충실 건전한 투쟁의 위력으로써 급변케 하니 우리는 이 위대한 법칙에 따라 우리 운동이 조직적 통일로부터 합리적 승리의 끝을 바라고 급진함을 본다.’ 한문 투 문장을 요즘 표현으로 약간 바꾼 이 문장은 1927년 1월21일 에 실린 인천청년동맹 창립 기사 중 일부다.‘세 단체 해산 즉시 인천청년동맹 성립’이라는 기사 제목처럼 제물포청년회, 병인(丙寅)청년회, 무산(無産)청년동맹이 각각 해산하고 하나로 뭉치기로 했다. 일제 경찰의 집회 금지로 창립은 서면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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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2019.07.0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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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문학면 관교리 독립만세운동은 3월 27일 횃불시위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 제2권 3ㆍ1운동사(상) 제3장 경기 서부지방 부천군 편을 보면 문학면(文鶴面) 관교리(官校里)에서 3월 27일 밤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횃불시위가 일어났다.부천군 문학면 관교리는 현재 인천 미추홀구 관교동이다. 지명 ‘부천군’은 일제가 구한말 지명인 부평군에서 ‘부’를 따고, 인천부에서 ‘천’을 따와 만들었다. 현재 인천 중구와 강화군을 제외한 나머지 인천 전체와 부천시가 부천군에 속했다. 일제는 현 중구 일대를 인천부로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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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봉 기자
2019.06.17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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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용유도 청년 혈성단, 3ㆍ28 독립운동 주도국가보훈처가 펴낸 ‘독립운동사’를 보면, 1919년 3월 28일 부천군 용유면(현재 인천 중구 용유동)에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용유면 군중 150여 명이 관청리 광장에 모여 큰 태극기를 중앙에 달고 기세를 떨쳤다.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일제의 재판을 받은 사람은 11명이고 모두 옥고를 치러야했다. 이중 일제가 일상적으로 감시한 인사를 정리해놓은 ‘일제 감시 대상 인물카드’에 등장한 인물은 조명원ㆍ조종서ㆍ문무현ㆍ이난의ㆍ최봉학 지사다.‘독립운동사’를 보면, 용유면(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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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봉 기자
2019.06.03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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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투데이 김갑봉 기자]인천보통학교 학생들 동맹휴업으로 만세운동 독려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타올랐다. 3ㆍ1운동 토대 위에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했다.‘독립운동사’를 보면, 인천에서는 3월 7일부터 만세 시위가 시작됐고, 3월 9일에 300여 명이 동참했다. 시위행진은 모두 8회였다.인천 상인들은 3월 30일부터 철시(撤市)로 일제에 항거했다. 일본경찰이 개점을 협박해도 눈가림으로 문을 열었다가 곧 닫아버렸다.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항거했고, 격문을 비밀리에 살포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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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봉 기자
2019.05.07 10:21